5. pushkar/ india

치투르가르 성을 떠나 밤 8시경 아즈메르에 도착, 아즈메르에서 머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바로 릭샤를 타고 푸슈카르행 버스 타는 곳으로 막차가 떠나기 전에 달려갔다.
자이프르의 남쪽 아즈메르는 작은 산맥과 호수로 둘러 쌓인 이슬람교도의 도시다. 인구는 40만 정도로 4개의 성문으로 둘러싸인 구 시가지는 장엄하고 화려한 붉은 모스크(이슬람 예배당)와 중동 풍의 바자르(시장)는 힌두와는 다른, 이슬람 문화를 나타내는 옷이나 생활 잡화 등으로 이곳을 찾는 여행 객들의 눈길을 바쁘게 한다.

     성스런 연꽃 전설이 깃든
     푸슈카르 호수.
     멀리 있는 산 위에
     브라흐마의 부인 사비트리를 모신 사원이 있다.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거의 한 시간이 넘어 밤9시 30분 경 푸슈카르에 도착하자 버스 안에서부터 자기네 호텔로 가자고 꼬드기는 청년을 따라 가기로 했다.
도중에 다른 호텔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기네 호텔로 가자고 들 할 때, 이 청년은 우리를「찜-」해놓았다는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이 말도 붙이지 못하게 하며 그들과 다투면서 가기도 한다. 그런데 진경이가 도로 가에 배낭을 맨 채로 주저앉아버리자 안내도를 다시 본 아빠는 한참 더 갈 것 같아서 인지 옆에 가까이 있는 옴 호텔로 그냥 들어가자고 했다. 방을 정하고 프론트로 나오니 아까 그 청년 아직도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 아빠가 나가 달래어 보냈는데 청년의 허탈해하며 실망하는 모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빠가 좀 미안해하자, 주위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아저씨들이 팔을 휘휘 가로 저으며 큰 소리로, 노 프로브렘 ! 노프로브렘 ! 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안쪽 길을 따라가다 지붕 위의 비너스라고 하는 색 전등이 반짝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우리 옆 좌석의 이태리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 맛있어 보여, 음식 이름을 물어보니 예쁘게 생긴 언니가 친절히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이것저것 먹어보게 하면서 고르게 한다. 역시 우리는 같은 동족 즉, 같은「배낭 족」이라 서로 통하고 서로 위해줄 수 있음을 느꼈다.

이슬람도시 아즈메르에서 11km 떨어진 뱀 산이라는 뜻의 낙 파하르 산을 넘어선 곳에 있는 고요한 힌두교 성지가 있다.
짙은 녹색의 성스러운 호수와 그곳을 에워싼 25개의 가트(목욕장) 주변에 하얀 색 신전들과 하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곳, 분위기 있고 차분하면서도 여행자들에 의해 활기가 넘치는 작은 마을이 푸슈카르이다.
힌두 신화「신성한 연꽃 전설」에는 푸슈카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성스런 호수는 천지 창조주인 브라흐마가 악마를 처치하는 전투를 벌이던 도중에 병기로 쓰던 연꽃의 세 잎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이 이곳에 떨어져 물이 용솟음쳐 생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사연으로 브라흐마 신은 카틱 기간이라고 하는 10-11월의 보름날에 제사의식을 치르기로 하고 모든 신들을 초청하게 된다.

  마침내 그 날이 되어 제사를 위해 시바를 비롯한 모든 신들이 그들의 짝과 함께 모였는데, 이 날의 주역인 브라흐마의 부인 사비트리가 게으름을 피우느라 의식을 치루어야 할 시간인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불같이 화가 난 브라흐마 신은 즉시 눈에 띄는 구르자의 순박한 소녀 가야트리와 결혼하여 부인으로 삼고 의식을 치루었는데, 늦게 서야 도착한 사비트리는 게으름을 피우다 늦었음을 미안해하기는커녕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 이 의식에 참가한 모든 신들에게 끔찍한 저주를 하나씩 내렸다.
  남편인 브라흐마에게는「비록 당신이 우주를 창조한 신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당신을 섬길 수 있는 신전은 온 세계를 통틀어 오직 이곳(푸슈카르) 한 곳뿐이게 되리라」는 저주를 남겼다.
  그래서 인지 브라흐마의 사원은 전 인도를 통하여 이곳 푸슈카르 한 곳밖에 없고, 호수를 사이에 둔 양쪽의 산언덕 위엔 사비트리(왼쪽)와 가야트리 (오른쪽)를 모신 사원이 호숫가의 브라흐마를 모신 사원을 중앙에 두고 자리잡게 되었다.

     전 인도를 통해
     이곳 한군데밖에 없는
     브라흐마를 모신 사원

  마을 안에 건설된 하얀 힌두 사원의 본존은 인도에서도 지극히 드문 브라흐마라고 하는데, 푸슈카르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성스러운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낸 후 최고의 신인 브라흐마를 참배한다. 호숫가에서 거니노라면 각지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이 가트와 사원에서 경건히 기도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다.

  아침 식사 후 호수로 나갔는데, 무슨 축제가 있다며 힌두교인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호숫가 계단으로 된 가트까지 소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새까만 소년들과 청년이 노란·빨강·분홍·자주색 빛깔 선명한 꽃들을 몇 개씩 갖고 다니면서 호수에 헌화하라고 주기도 한다.
  호수 위 허공을 나즈막히 비둘기 떼가 무리 지어 날아다녔는데 그 모습이 푸른 호수 물에 비쳐 보이기도 해 무척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우리는 시장 길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구경도 했다. 색상이 아름다운 여러 가지 옷들과 장신구들, 거울조각이 붙인 기념품 볼펜, 음악테이프, 축제 때 쓰는 색색의 가루분, 책, 놋그릇 등을 파는 가게들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아빠는 한 진열대에 걸려있는 빨강·파랑·노랑 등의 화려한 색깔의 누더기 천들로 기워 만든 각설이 바지 같은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바라보고 만져보곤 했다.「이거 집에 가져가서 입고 다니면 좋겠다」하며 이미 마음으로 결정하고서, 우리를 한번 쓱 바라보았는데, 아주 떨떠름한 우리들의 표정을 보자 잠시 머뭇거리며 결정을 미루는 것 같다. 색깔이야 예쁘겠지만 저걸 샀다가는 여행 마치고 동네 가서 입고 다니실 터인데 그걸 생각하면, 정말 말려야 될 상황이었다.

약간 특이하고 예술적으로 생긴 모습에 삭발까지 하고, 항상 까칠까칠한 수염에다가 지금은 아메다바드에서 구입한 모슬렘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게다가 저런 울긋불긋하고 야한 바지를 입고 다닌다면 인도에서야 괜찮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선, 훗날 귀여운 두 딸의 혼삿 길에까지 문제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빠는 엄마와 결혼 전 외갓집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도, 꺼칠한 수염에 물감 묻은 낡은 바지를 입고 머리엔 빨간 왕초모자를 평소 모습대로 쓰고 갔다 하니, 이를 본 외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을 해도 짐작이 갈만 하다.

오후엔 아즈메르로 나가서 시내와 시장 구경을 했다. 고불 고부랑 산언덕을 넘어 내려가는 길에서 보니 몇 개의 커다란 호수가 시원하게 아즈메르시를 둘러싸고 있다. 버스 창문을 통해 갓 구워서 파는 땅콩도 사먹었는데 따끈따끈한 맛이 아주 고소했다. 우리는 시가지를 걸어 돌아다니다가, 간식으로 바나나를 배가 부를 정도로 실컷 먹었는데 산지직송 과일이어선지 맛이나 싱싱함이 매우 좋았다. 아즈메르 이후로 틈틈이 맛 좋은 바나나를 샀는데 언제나 깨끗하고 싱싱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구 시가지 바자르에서 간단한 기념물이라도 사려고 몸이 쳐질 정도로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게 없어 손수건 몇 장만 구입하는 것으로 아즈메르에 대한 추억을 정리했다. 우리의 마음이 머문 곳은 고개 넘어 작은 마을 푸슈카르에 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인도 청년들이 아빠가 들고 있는 하얀 색의 여행계획과 기록이 담긴 노트를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 싶어 했다. 아빠가 보여주자 한 장 한 장 들쳐 보며 흥미로워한다. 쓰여진 글씨들을 보며 한글이냐고 묻기도 하고, 그려진 약도들을 보며 어디냐고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꼭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는다. 남한에서 왔다고 하면 반색을 하며 좋아한다. 이렇게 지내오다가 언젠가는 한국에서 왔다고 한 후 남북한을 묻기도 전에 남한이라고 습관적으로 대답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마음은 괜스레 뜨끔하고 찝찝해 진다. 왜 그냥 코리아라고 하면 안되고 남북한을 꼭 구분해서 묻는지, 그리고 그렇게 말하게 된 뒤, 마음이 뒤숭숭하고 편치 않게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 」

   푸슈가르로 돌아와 정거장에서 내리니까, 낮에 차를 기다릴 때 친했던 청년들이 언니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헬-로, 하아유?」하며 인사를 건네와서, 언니가 얼떨결에 「파인 쌩큐 - !」하고 대답을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튀어나온「잉글리쉬」라서 언니는 황당하고 소녀다운 쑥스러움으로 입을 막고 몸을 틀면서 웃었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내려서 엉거주춤 모여있던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모두 다 큰소리를 내며 웃는 것이다.
  아마, 말은 안 해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색깔 다른 우리의 행동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트(목욕장)와 호수

  다음 날은 하루 종일 호수가 에서 시간을 보냈다.
  계단에 앉아서 공책에 낙서를 하기도 하고, 강아지에게 과자도 주고, 호수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망원경으로 호수건너 하얀 건물들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2시쯤 비너스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나와 내 동생은 치즈라이스와 그 외에 마카로니 세 접시를 간단히 먹고 다시 호수로 왔다.
  호수로 가는 길엔 한 여자가 동냥 통을 앞에 놓고 있다. 팔찌와 귀걸이, 그리고 여러가지 색으로 꾸며진 목걸이를 한 여자의 모습은 많이 얼룩지고 상한 검은 색 피부에 낡고 붉은 사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엔 코가 없다. 그냥 평평한 곳에 구멍만 있는 것이다. 문둥이였다. 적선하러 가까이 가기도 두렵다. 정상이 아닌 사람의 모습은 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줄까? 우리는 지날 때마다 똑바로 앞만 보며 지나갔다.

뜨거운 햇볕 아래 태평스러이 곤하게 잠자는 순례자, 호수 물에 목욕하고 빨래하는 사람들, 어슬렁거리는 검정 소와 하루종일 잠만 자는 잠퉁이 게으른 개, 온몸에 땜통이 올라 얼룩얼룩한 더럽고 병든 개, 귀여운 강아지들, 현을 켜는 악사, 호수 위를 나는 비둘기들, 비질하는 아줌마, 구걸하는 아이, 건물 옥상 여러 곳에서 연 날리는 사람들, 새 떼처럼 나는 연, 검정 모자와 단추가 목에서 발 아래까지 오는 검정 옷을 입은 마술사처럼 생긴, 챔벌린을 미친 듯 마구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깡마르고 괴상한 분위기의 아저씨, 호수와 신전들을 무대 삼아 조용히 가라앉는 석양, 그리고 원시적으로 들려오는 북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창조주의 연꽃에서 생겨났다는 푸슈카르 호수 속에 하나로 녹아 들고 있었다.
… 호수 가의 선셋 풍경들은 그야말로 황홀하다.

　해 거름에 가트에서 열댓 명의 순례자들이 목욕을 하고 있다. 머리카락은 오래도록, 몸은 간단히 물을 끼얹는 정도지만 그래도 팔을 뒤로 해서 조그만 천으로 등을 문지르기도 한다.
  얇고 긴 황색 천을 호수에 집어 넣어 빨아 두 사람 씩 펼쳐 잡고 가트에 널고 있다. 1m 폭에 2-30m의 길다란 황색 천 열 몇 개가 가트 위에 널려 있다. 시멘트로 된 회색 가트 위에 황색천이 강렬한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옷일까? 무엇일까 궁금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는데 그들의 스커트 비슷한 룽기라고 하는 바지는 흰 천으로 허리를 한번 두르고 양다리사이로 끼워 다시 한번 더 돌린 뒤 남은 천을 옆구리에 끼워 넣는 것으로 아랫도리 입는 것은 끝이다. 길다란 황색천은 여린 석양빛으로도 금방 마를 정도로 얇은 것이어서, 석양의 그림자가 가트 층계 한 칸을 더 늘여 나가기 전에, 이내 마른 그 천들을 사람들은 머리에 둘둘 말아 뭉치고 있었다.
우리가 놀라웠던 것은, 머리에 두른 터번이 저렇게 긴 천이였다는 것이다 !

지금 인도에서 나타나는 이 모든 광경들은 내가 5, 6살 때부터 꿈속에 보았던 장면들이어서 신기하다.
뭄바이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과 현재 호숫가에서 일어나는 광경들은 꿈에 본 내용으로 현실에 나타나고 있어서, 앞으로의 일들도 꿈에 본 내용들로 이어져 나갈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지금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할 때가 많다.

아빠가 무지 사랑하는「장자」라는 동양의 한 현자는 이런 말을 남겼단다.

「어느 날 나는 꿈속에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이리저리 기분 좋게 날아다녔다. 이때는 내가 사람인 줄 모르고 완전한 한 마리의 나비였다. 그런데 나중에 잠에서 깨고 보니 나비가 아닌 사람인 나였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나비인 내가 사람 꿈을 꾸는 건지, 사람인내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사람과 나비는 분명히 별개의 것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별의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이 사물의 변화인 것이다.」

  이는「장자」의 제물론에 있는 사물이 변형되어 가는「물화」의 경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인데, 꿈과 현실이 하나로 합일되어 자유로운 영혼의 경계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이런 참에 나도 그런 경지에나 이르러 봤으면 좋겠다.
  아빠도 10년 전에 꾼, 인도의 꿈을 가지고 있다.
  내용은 30년 뒤나 되는 먼 후일의 일이라고 한다.

꿈속에서, 그때쯤 아빠는 영원한 방랑의 거지가 되어 이곳 저 곳을 떠돌다가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서 피로에 지쳐,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깊은 단잠에 떨어져 있었단다.
어디선가「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 퍼뜩 잠이 깨어 바라보니 오래 전에 집을 떠나온 이후, 영혼의 끝머리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도저히 잊혀지지 않던 자식이었다. 먼 옛날 우리를 두고 떠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모습만 간직하고 있어 이제는 알아볼 수도 없었을 텐데, 어엿한 중년 여성이 되어 나타난 딸을 직감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앞에 나타난 맏딸은 두 손 가득 아버지의 손에 흘러 넘치듯 무엇을 넘겨주었는데, 받고 보니 그것은 수십 개의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였다는 것이다 … .
꿈은 꿈이고, 아빠는 과연 그때쯤이면 또 다른 세계의 지평을 넘어갔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