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KHAJURAHO  '99. 1. 23- 1. 26
　
　　

    달의 신화　                                                                        

  밤 기차에서 모기에게 40군데나 물리는 신세가 되었다.  
  흐흑 - , 아까운 내 피를 모기한테 뺏기다니, 침낭 속에 푹 들어가서 잤는데 ….  얼굴에도 손에도 마구 물려서 가려워 약을 발라야 하는 팔자가 되었다.  

  기차는 세시간이나 한군데 머물러 있다.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옆 칸의 어떤 인도 아저씨가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고, 트림을 해대는지 교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 같다. 오늘 밤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제처럼 아무한테나 시비 거는 인도 여자 애는 더욱 싫다. 진경이는 인도에 온 후로 네 번이나 싸웠다.  불쌍한 내 동생, 인도에 와서 싸움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싸트나에서 내려 버스로 가는 길에 내 옆에 앉은 남자애가 장난감 공기총을 만지작거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흘끔 흘끔 바라보며 부르는 눈치가, 우리들에게 으스대는 꼴이다. 꼴불견이긴 했지만 귀여운 점도 있어 웃음이 났다. 여러 번 차를 갈아타고 가는 카주라호는 유명한 것에 비해 교통이 불편했다.

  카주라바티카로 알려졌던 지금의 카주라호는 중세시대에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했던 찬델라 왕조가 건설한 도시이다.  「카주르」는「야자」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카주라호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두 그루의 야자나무가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거기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다 한다.  카주라호에 예술적인 사원들을 조성해 놓은 찬델라 왕조는 이처럼 외진 곳에 수없이 많은 사원들을 조성해 놓은 것을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 근사한  신화를 갖고 있다.

  신화에 의하면 달의 신인 찬드라가 과부 헤마바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슴을 졸이다가 마침내 어느 여름 밤, 지상에 내려와 그녀와 회포를 나누고 아침 이슬 녘에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 찬드라는 떠나기 전 그녀에게 지난밤의 결과로 나오는 아이는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천하를 지배하는 왕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들은 수많은 사원을 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달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녀를 안았네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했다네
    용맹스런 아들을 낳으리라고
    그 아들은 왕이 된다고….

  이 예언에 따라 이 아이가 커서 후일 찬델라 왕국을 건설하고 그 시조가 되었다는 찬드라뜨레이야 (달의 아들)이다. 찬델라 왕조는 인도 대륙의 중반부에 걸쳐 폭넓은 영역을 확보하였고, 오백여 년을 이어가던 찬델라 왕조는 결국 이슬람 세력에 의해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마치 신화의 내용을 현실화시키려는 듯, 그들이 한때 수도로 삼았던 카쥬라호에 950년 당대의 왕 아소바르마나로부터 1050년까지 불과 100년 사이에 무려 85개의 사원을 조성해 놓았다.  지금은 비록 22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처럼 동떨어진 곳을 수도로 삼아 황금시절의 장소라는 뜻의 카쥬르바티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많은 사원을 짓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카주라호가 교통마저 외진 위치에 자리잡음으로써 이곳의 사원들은 11세기부터 인도의 중부와 북부를 휩쓸며 우상 파괴의 명분아래 아름다운 사원들을 사정없이 파괴해버렸던 이슬람교도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쪽 신전 군　

  서쪽 신전 군은 카주라호를 대표하는 신전들이 몰려있다. 이 부근은 T자 모양의 삼거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숙소와 식당,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선물가게들도 줄지어 있다. 이곳에 있는 신전들은 대개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9개의 신전을 한데 묶어 넓은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관리가 잘 되고 있기 때문에 깨끗하다.
 

  돼지 상이 있는 사원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 제일 먼저 락슈미나 사원이 나오는데 이 사원은 900년경에 건축된 것이다.   
  작은 규모의 신전인데 비슈누 신의 3번째 화신인 돼지를 모신 곳이다. 이 돼지 상은 사원 안에 하나만 있고 사원크기에 비해 큰 크기로 조각되어있다. 그의 전능성을 표시하기 위해 비슈느신 몸 위에 수없이 많은 조그만 신상들이 줄을 지어 새겨져 있다.
  뺨에는 아홉 개의 행성이 사람 모습으로 상징되어 새겨져 있고, 넓적한 코 부분에는 강물의 여신 또는 어머니의 신, 학문 예술의 신으로 불리는 싸라스와티 여신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네 발 사이에는 바다가 뱀으로 암시되어 나타나있고, 몸체가 떨어져 나가 발만 남아있는 것은 작은 땅의 여신인 지모신이라 한다.  돼지 모습의 비슈느 신상은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몸 전체에 인형처럼 붙어있는 신상들을 가깝게, 아주 자세히 손으로 더듬어가며 촉감으로 관찰할 수 있어서 더욱 실재감이 난다.   
 

   미투나 상이 있는 사원들

  신전의 벽은 온갖 신과 여신을 비롯하여 요정이나 신화상의 동물들을 묘사했고, 병사와 연주가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조각해놓았다. 사원을 장식한 조각들은 보면 볼수록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종교 의식 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사원들에는 그들 찬델라 왕조가 주로 섬겼던 창조와 파괴의 신「시바」와 그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세계평화 유지신인「비슈누」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35km 떨어진 칸 강에서 사암을 가져와 건축한 이 사원들을 돋보이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사원의 신전들의 외벽을 둘러싸고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조각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의 볼거리는 남자 신과 여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조각들이다.  미투나 상이라고 하는 남녀신상의 모습은 서로 얽혀 사랑하고 있는 모습들인데, 그 행위와 표정들은 진지한 모습으로 조각되어있다.  락슈미나 사원의 서쪽 곁에 자리잡은 바하라 사원은 930-50년경에 상당한 크기의 규모로 건축되었다. 요정들의 조각들과 함께 사원을 받친 기단 주위에는 한 뼘 정도로 새겨진 작은 크기의 귀여운 미투나 조각 상들이 있다.
 
  우리는 여러 미투나 상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 야하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화장터에서 숯 덩이가 되어 붉게 타고 있는 송장들을 보고도 색다르게 보여지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있었던 것 같이 말이다. 아빠는 우리가 초등학교 저 학년 때 어린이용 성교육에 관한 책을 두어 권 사 주었다. 거기에는 성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에 관한 내용들이 있고 어린이의 성과 어른들의 결혼 생활에 관해서도 자세하고 꾸밈없이 서술되어 있었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미투나 상도 어렴풋이 함께 느껴 볼 수도, 알 것 같기도 한 모습들이다.
 
  어른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데엔 우리들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벗은 몸의 아름답고 예술적인 모습도 미술 작품들을 통해 아기 때부터 눈에 익혀와서 인지 그 자체로 좋았다. 희랍의 레슬링 선수들 모습이라든가 원반 던지는 사람 그 외 조각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비롯한 다른 작품들, 그리고 루벤스의 육체파 아가씨들, 르노와르의 풍만한 몸매의 여인들, 클림트의 고혹적인 사랑의 작품등은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 몸을 소재로 한 것들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장난감처럼 화집을 펼쳐보며 지내왔는데 미투나 상들도 우리 눈에 익고 비슷한 모습들 같다.
 

  정원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면 왼편으로 첫 번째 만나는 사원이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이다. 예술적으로나 건축미로나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 사원의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9백 개가 넘는 조각들은 사람들의 온갖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카주라호 미투나 상들 중의 유명한 것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칸다리야 사원보다 조금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비 자가담바 사원도 870여 개의 장식조각이 있다.
  내용은 시바신과 파르파티 부부상, 깊은 희열로 넘어드는 미투나 사랑의 모습, 그리고 갖가지 에로티시즘의 극치인 조각 상들이다.  이런 모습들은 인간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상징과 궁극에 이르는 참된 길로서 서로의 교류 안에서 삼매의 경지를 깨닫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음양이 조화되고 인간이 신과 우주와 화합되어 하나에 이르는 경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신 앞에 서기 전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는데, 신전 근처에 있는 연못이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런 미투나 조각 상들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참배자는 신전 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욕망을 버리고 들어가야 하며, 원초적 본능까지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신 앞에 서기 전에 이 조각 상들을 보고 마음이 동요된다면 그는 아직 신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거다.
       힌두 인들은 말한다.

　   참된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참되다.
      이 둘은 거룩함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다.
      이 셋은 영원하고,
      신의 영원한 본질을 드러내는 세 모습이다.  

　 나와 진경이는 뜨거운 태양아래 다니기가 힘들고 더위에 지쳐서 주로 사원 안 통로부근 기단에 앉아서 쉬었다. 사람들이 간간이 출입하는 통로에 앉아 묵·찌·빠 놀이도 하고, 손바닥을 좌우 위아래로 맞춰가며 푸른 하늘 은하수도 하며 놀았다. 아빠는 여러 사원을 돌아다니다가 밖에 벗어 논 우리 신발을 확인해보고 간다거나 가끔 올라와 보고 다시 나가곤 했다.  
 

  사원은 신들의 거주지이자 신과 인간, 차안과 피안이 만나는 곳이며 사원의 탑은 우주의 축인 신비스러운 산을 상징한다.
  힌두 신앙에 따르면, 모든 현상세계는 자연이라는 어머니 품에서 생겨났고, 이 어머니의 품은 산의 동굴로서 상징된다. 따라서 사원의 방은 동굴이나 어머니의 자궁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동굴 또는 자궁을 지닌 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 없이 많은 여러 신들의 조각으로 채워져 넘치게 되었다.  사원 안들은 외부만큼이나 다양한 신상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약간의 통로를 지나 안은 둥글게 꾸며져 있어 경주 석굴암 구조와 비슷했으나 가운데 기둥을 둘러싼 조각 상들과 안쪽 벽에는 위 아래로 신과 인간 정령, 축생, 악마, 현자 등이 함께 어우러져 강렬하고 동적인 모습들이 새겨져 어두움 속에서도 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사원 밖은 뜨거운데 내부는 그늘이 지고 바위 돌들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시원하다. 정말 동굴 안인 듯 싶을 정도로 어두 침침하며, 습기로 인해 물방울이 떨어지는 곳도 있다.   
 

   소의 상이 있는 사원

  입구에서 한바퀴 돌아 북쪽 끝에 있는 바만 사원은 난디라는 소가 있다. 올라가는 계단에는 우리 키 만한 귀여운 코끼리 상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다.  난디는 시바의 탈것이었는데, 소의 형상을 갖기 전 까지는 수행자로써 시바의 문지기였다. 난디는 풍요, 다산 등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인도 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신전 조각들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완전한 작품을 이루고 그 작품들이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탑을 꾸미고 있다. 카주라호 신전들은 인도종교의 열정으로 조각과 건축 미술이 하나가 되어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발달한 것이라 한다.  
 

   미투나 장난감

  사원을 나오니 가방과 옆구리에 책과 기념품을 끼고 다니는 장사꾼이 다가왔다. 이것저것 물건을 보여주며 고르게 했지만 마땅히 사고 싶은 것이 없었다. 맨 나중에 장사꾼은 주머니에서 놋쇠로 만든 장난감을 꺼내 보였다.  아빠는 이 장난감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고 몇 개 샀다. 우리도 아빠에게 하나씩 달라고 해서 갖고 놀았는데, 움직이는 모습이 아주 귀엽고 웃겼다. 즉 사원에 새겨진 미투나상들을 가지고 장난감을 만든 거였다.

   그 중 하나는, 여자가 ㄱ 자로 엎드려있고 뒤에서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서서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인데 손잡이를 잡고 흔들면 되는 것이다. 아빠와 진경이는 길에서 장난감 손잡이를 흔들어대며 다녔다. 아빠는 상당히 재미있는 표정이다.  여자는 왜 안 움직이게 만들었냐고 진경이가 궁금한지 물었다. 여자까지 움직이게 만들면 손잡이도 따로 만들어야 되고 좀 복잡해질 것이라고 아빠는 말하면서 장난감을 흔들며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아빠가 알쏭달쏭한 어떤 수녀 얘기를 해줬다.  

 옷을 입은 채 목욕을 하는 수녀가 있었다. 누가 그 수녀에게 왜 옷을 입고 목욕을 하느냐고 물었더니,「네가 어디를 가든, 어느 곳에 있든 하나님이 너를 살펴보고 계시니라」라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어떻게 하나님이 보고 있다는데 부끄럽게 발가벗을 수 있겠어요? 라고 했다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위선을 벗어버리면 자유롭고 편하게 목욕하거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일 게다.
 

  마틴게슈라와 사원과   노래하는 샴 할아버지 　

  서쪽 그룹 입구에서 바깥쪽으로, 락슈미나 사원 담장 건너편에 있는 이 사원은 현재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참배되고 있는 마틴게슈라와 사원인데,  시바신의 상징으로 크기가 2.5m에 이르는 남자 성기 모양인「링가」가 향기로운 꽃잎이 소복이 흩뿌려져 싸여있는 곳에 모셔져 있다. 성기의 숭배가 다산성의 우상으로 자리잡은 것은 인도의 역사이전 시대부터이다.

  링가의 근원에 대한 신화에 따르면「… 불현듯 하늘에 그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났다. 그 불기둥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불기둥은 링가의 형상으로 바뀌어 자신을 열어 보였고, 그 속에는 모든 것의 최상의 권력으로서 시바신이 서 있었으며 다른 모든 신들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신화를 연유로 해서 시바신의 상징으로 링가가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한다.

  이 사원 앞에는 하루종일 눈먼 할아버지가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럴 듯 하게 말하자면「노래하는 성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성자라고 하기에는 약간 그렇고, 하여간 노래하나는 심금을 울릴 정도다.

  사원 멀리 검은 나무숲 위로 빨간 석양이 머뭇거리고, 뜨겁게 달구어진 사원의 돌 지붕들도 서서히 열기를 잃어 침묵에 젖어들 때,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무리 지어 나는 새떼가 내일을 향해 뿌리는 씨앗처럼 흐트러져 갈 때면, 이 할아버지의 노랫가락은 마을과 사원의 잔디밭으로 더욱 넓게 울려 퍼진다. 우리들이 느끼기에도 마치 커튼이 활짝 열어 제겨져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탐부라 라고 하는 조그만 현악기를 양 무릎사이에 두고 현은 오른손으로 뜯고, 호박 바가지로 만들어진 울림통을 왼손의 반지 낀 손가락으로 두드려 가락을 맞추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목청도 울림이 아주 좋다.  할아버지는 최고의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자세로, 땅바닥에 쪼그려 앉은 형태로, 몸의 구조가 서서히 흘러 고정이 되고, 오랜 세월동안 그 자체로 틀이 되어 이제는 하나의 악기로 되어버린 듯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 사원의 붉은 불빛이, 탁탁 울림통을 치는 손가락의 구리반지를 따라 흐를 때쯤이면, 노래 부르기를 끝낸 샴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앞에 놓여진 깡통에서 잔돈을 정리하고, 검고 깡마른 손으로 안주머니에서 한 손 가득 고르게 접어 넣은 돈을 꺼낸다. 그리고 옆에 기다리고 앉아있는, 아침저녁으로 오가며 지팡이 끝을 잡아 인도하는 과부 같은 할머니에게 두 장의 지폐를 사례로 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일어난다.
 

  동쪽 신전 군  

  아침에 몸이 무거워서 누워있는 언니에게 메모를 써놓고 나와 아빠만 산보 삼아 걸어서 갔다. 원래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려했는데 아직 이른 아침이라 점포가 문을 안 열었기에 걸어간 것이다.

  동쪽에 있는 신전들은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어 마을의 들판을 따라 가다보면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우리는 그중 북쪽에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20여분 정도를 걸어가니 나로라 탱크라고 하는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저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있다. 저수지 옆 길가엔 조그만 브라마 사원이 망고 나무 그늘에 서 있는데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사당이지만 벽에 새겨진 조각들은  볼만했다.  조금 더 가자, 거대한 고목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늘에서 놀고 있던 동네 꼬맹이들이 서로들 망고 나무라고 가르쳐 준다.
  붉은 지붕을 한 상자모양의 하얀 집들이 망고 나무 아랫길로 줄을 지어 있는데, 시골 변두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반듯하고 깨끗한 집들이다. 들판 길로 백여 미터 내려가니 자바리 사원이 홀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청소하는 관리인 한 사람만 있고 아무도 없는 평화로운 전원 속의 사원이다. 사원 밖 논 웅덩이에서는 두 사람의 여자가 항아리에 물을 퍼 담고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가운데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북으로 약 이백여 미터 간격을 두고 바마나 사원이 있다. 이곳은 둘레에 제대로 된 철망이 쳐져 있어, 관리에 더욱 신경 쓰는 것 같다. 푸른 숲과 넓은 잔디밭, 전원풍경으로 더욱 고요한 이곳 뜰에는 유채 꽃 같은 노란 꽃들과 보라색 꽃들이 예쁘게 피어 깔려있고, 사원 아래 잔디밭에는 사원 지붕을 장식하던 조각무더기들이 쌓여져 있다.  걸어서 동쪽신전들을 다 구경하기는 힘들어 이 정도만 보고 돌아왔다.

  마을 어귀에서 아줌마가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빈둥거리던 소 한 마리가 슬슬 걸어와서 채소를 먹으려고 한다. 아줌마는 몇 차례 밀쳐 쫓아냈다. 그래도 자꾸 다가와서 채소를 주워 먹으려고 하니까 아줌마가 열을 받았는지 옆에 있던 몽당 빗자루로 소 대가리를 세게 패는 것이다.  몇 차례 얻어맞은 소는 채소도 먹어보지 못하고 덤덤히 그냥 딴 곳으로 걸어간다.  

  길가 상점 앞에서 소년이 파는 차이를 마셨다. 뜨거운 아침햇살에 지친 우리는 이 차이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 이곳은 벌써 입춘이어서 그런지 무덥다. 2월은 이미 한여름이라고 하니 서서히 달궈질 만도 하겠다.
 

  오후에는 동쪽그룹에서도 남으로 있는 사원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갔다. 언니는 속이 안 좋은지 그냥 숙소에 있기로 하고 나는 내게 맞는 자전거가 없어 아빠 자전거의 짐 칸에 타기로 했다. 고물 자전거로 십오분 정도 거리에 사원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니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최근에 지은 무슨 호텔들인 줄 알았다.

  이다나타 사원만 빼고 모두 수성페인트 칠이 되어 아빠는 영 쓴맛을 다셨다. 유적에서 풍겨 나오는 깊고 그윽한 맛이 없어진 것이다. 이다나타 사원 벽에는 남녀가 서로 한쪽무릎을 포개어 얹고 다정하게 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는 조그만 상들이 줄을 이어 장식조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포근하고 다정하게 지낼 수도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다. 서쪽그룹의 조각들은 강렬한 인상이었는데 여기는 좀더 차분하고 다감한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 사원 가까운 곳에는 소규모의 계단식 우물이 있는 것도 보였다.
 

  이곳에 있는 사원들은 자이나교 사원이라 한다. 자이나교는 무신론의 종교로 행위가 업을 만들고 윤회로 속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한 계율과 고행을 지켜야만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살생금지와 무소유가 강조된다. 옷을 안 입는 유파의 수도승은 무소유의 극치로 완전히 발가벗고 생활하며 수행에 힘쓴다. 이 종교는 불교와 더불어 개혁적인 의의를 지니고 함께 출발하였다. 예언자 마히비라의 조각상은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중앙에 모셔져 있는데, 붓다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뒤에서 고등 학생쯤 되는 오빠들이 자전거를 타며 휙 지나갔다. 우리는 천천히 달렸는데,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낄낄거리고 가는 폼이 마치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자는 듯, 따라와 보라는 표정들이다.   아빠도 장난기가 돌았는지 속도를 빨리 하며 그 오빠들을 향해 눈을 찡긋했고, 나는 메롱∼하는 흉내를 냈다. 이래 가지고 은연중에 들판 길에서 자전거 시합이 벌어졌는데, 나는 뒤에서 아빠허리를 꽉 잡았고, 페달을 열심히 밟는 아빠의 자전거는 앞으로 쭈욱 나갔다. 조금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오십여 미터 뒤에서 오빠들이 낑낑대며 오고 있는 거였다.「저 정도 실력으로 까불다니!」하면서 아빠와 나는 웃었다. 인도 오빠들도 우리를 바라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되겠다 싶은 모양들이었다.

  아빠는 속도를 줄이고, 나는 손가락을 V자 모양으로 해서 흔들어 보이려고 했는데, 어느새 옆길로 샛는지 오빠들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시절부터 격투기 운동으로 다져온 우리 아빠의 체력을 몰라보다니 … 흥!

   서쪽 사원그룹 앞의 넓은 뜰

   고고학 박물관
  서쪽 신전 군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뜻밖에 멋있고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사원에 다닥다닥 붙어 장식품 같던 조각들이 이곳에는 하나 하나의 작품들로 각각 떨어져 진열이 되어 있으니 훨씬 예술적 순수성이 돋보였다.  아빠는 여기서 아주 몸매가 아름답고 역동적인 모습의 여신상 몇 점을 스케치했다. 사진으로 찍었으면 좋았으련만, 사진기는 입구에서 가방과 함께 소지품 보관함에 넣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태극기가 있는 식당
  아씨 식당은 한국사람들의 단골 식당이다. 그래서 가게 앞에는「사람 좋고 음식 좋고, 한국사람 모여라」하는 간판도 붙어있다. 안쪽 벽 아래는 서툰 솜씨지만 태극기까지 그려져 있다.  우리가 처음 카주라호에 온 날, 바라나시에서 재은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곧바로 들어갔었는데, 메뉴 판에는 눈에 익숙한 수제비, 볶은밥, 라면, 감자국, 계란국 등등 여러 가지 한국음식들이 있고, 김치는 공짜다. 우리 가족은 라면 둘, 볶음밥 둘을 시켰는데, 장난 아니게 맛이 있었지만 양이 너무 푸짐해서 볶음밥하나는 결국 먹지 못했다. 입이 맞으니 마치 한국의 조용한 마을에 휴양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재은 언니가 여기 주인으로 있는 우찬희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어딜 가고 없어 내일 전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오기에 편지를 전해 주었더니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청년 우찬희는 원래 인도 사람이지만 우리 나라 여행자들과 친분 관계가 깊어지다 보니까 이름도 한국식으로 하나 지은 것이다.　

  광장풍경
  해거름이면 사원 울타리를 따라 북으로 조금 가는, 관광객을 태운 낙타가  지나가기도 하는 길가에 달걀 장사가 나와있다. 여기서 달걀을 바로 삶아 파는 것이 아니라 미리 삶아와서 뜨겁게 데워주기만 하는데, 이것도 맛을 내는 기술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몇 일간 단골이 되어 이용을 했다.

  달걀 장수 아저씨는 껍질을 벗겨서 주려고 하지만 우리는 한사코 그냥 달라고 한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달걀에 꾸중한 손의 땟물이 묻어서 싫기 때문이다. 양념 소금을 줄 때는 몇 가지를 섞어서 주는데 매운 것을 빼달라고 하면 우리 입에 딱 맞는 양념 소금이 된다.  돌아서 걸을 때면 아저씨의 친절을 꺼린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까다롭게 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씨식당에서 볶은밥 하나, 라면 둘, 핫 쵸코로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밤이라서 넓은 마당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문화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내용은 우리가 거의 한달 간에 걸쳐 보고 다닌 자이프르, 우다이프르의 궁전이라든가 역사유적에 관한 것이다. 물론 카주라호 신전에 관한 것도 상영되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여행 복습을 하게 되었다.  마을 곳곳에「카주라호 1,000년」이라는 관광 및 기념 포스터가 붙어있는데, 아마 그런 행사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삥 둘러서거나 앉아 관람하고 있었고 내용에 재미를 못 느끼는 아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마당에서 뛰어 놀고 있다. 아빠는 영화를 관람하고 우리는 얼굴이 익었던 동네 아이들과  벽돌을 깔고 앉아 공기놀이를 하였다. 공기놀이하는 방식은 우리하고 같아 함께 어울려 놀 수가 있다.  얘네들은 진경이 내 이름을 부를 때「경」자 발음이 되지 않아 언제나 「진겅 !·진겅 !」이라고 불렀는데 느낌이 좀 이상했지만 새로운 인도 이름이 생긴 것으로 여기니 좋았다.

  이 동네 아이들은 다른 곳 아이들보다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리고 관광지여서 그런지 한국 말도 몇 마디씩  하면서 다정하게 대해 준다. 우리가 한국인인줄 알고 '사랑해요, 사랑해요'한다. 그래서 우리는「사랑해요」는「아이 러브 유」라는 말과 같다고 이야기 해주었더니 함께 공기놀이하던 아이들이 양손을 흔들어가며 깔깔거리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사랑해요, 사랑해요' 하는 것이다. 아마「사랑해요」라는 말뜻은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아빠는 식당에서 보았던 인도 아저씨를 만나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 이름이「씹」이었다. 우리말로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빠가 여러 번 씹? 씹? 하며 되 뇌이니까 다시「씹·민」이라고 한다. 아마 아빠가 의아해 하는 것 같으니까 성하고 이름을 같이 얘기해 주는 것이다.  

  상점의 한 청년은  물건을 소개하면서 친근함을 나타내려고 우리 나라 말을 했는데,「실례합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물건 하나 보여주고 실례합니다, 무엇을 가리키면서도 실례합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했다. 그리고 우리가 나갈 때도「실례합니다」했다.  물론 우리가 처음 들어갔을 때도「실례합니다」했다.　

   결혼식 예비행사 　

  박물관 옆 공터에는 이곳 유지 아들의 결혼식 준비가 있었다. 큰 공연을 하는 것 같이 휘장과 무대를 만들고 마당 전체에 천을 쳐서 햇볕 가리개를 설치하는 중이다.
  정작 결혼식은 이틀 뒤였는데 여러 가지 행사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내일 이곳을 떠나기 때문에 결혼식 구경은 못할 것이다. 저녁에는 연극과 춤 음악공연이 있고, 악대가 동네 한바퀴를 돌아 동네 전체에 축제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사백개 정도의 의자가 행사장에 줄을 맞춰져 놓여 있고 거기에 동네어른들이 앉아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여러 번 손짓을 하며 자리를 만들어 들어오라고 한다. 어제 이태리언 식당에서 만났던 아저씨였다. 형님 아들의 결혼행사니까 주인 역할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배려에 고마웠지만 군중들 틈으로 끼어 들기가 뭣해서 감사하다는 표정을 보이며 사양을 했다.

  이태리언 식당은 주방장이 일본 사람이다. 주방장은 전생에 인도 인이었는지 모습도 인도사람과 비슷하다. 그래서 인도에 와서 사는가 보다. 그러나 이생의 일본 솜씨를 발휘해서 음식이 아주 깔끔하다. 언니가 속이 안 좋을 때   「에그라이스 스프」를 먹고 속을 가라앉힌 곳인데 에그라이스 스프는 달걀과 쌀을 푹 고와 죽을 만든 후 소금으로 간을 맞춘 음식으로, 정성들여 간을 맞춰야지 제 맛이 난다.     

  신랑의 친척되는 여자아이들이 전통복장인 사리를 차려 입고 한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니, 앉으라고 몸을 옆으로 좁혀 자리를 만들어준다. 이런 것을 보면 카주라호 아이들은 마음이 참 따듯 하다. 얼마 안 있어 언니가 몸이 피로한 것 같아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오전에도 결혼식 행사가 있었다. 악대가 앞에서고 신랑 신부와 친척들이 가장 행렬하듯 동네를 여러 차례 돌았다.  두 줄로 서서 행진하는 학생들 숫자도 굉장했다. 광장 안쪽으로 약간 허름하지만 궁전처럼 생긴 중후하고 멋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였다. 그런데 마치 이 학교 학생들이 다 참여하는 것 같다. 이 마을 사람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해서 거의 모두 친척이 되는 가보다. 친척이 아닌 아이 몇 몇은 창문을 통해 구경을 하고 있다.
  가장행렬을 보니 사람의 일생과, 아이들의 꿈 미래의 관한 것도 있었다. 공주, 화가 등의 갖가지 꿈들이 펼쳐졌다.  행진을 하는 어떤 남자 애는 긴장이 되어 그런지 걸음을 특이하게 걷는다. 왼발 나갈 때 오른 팔이 나가고 오른발 나갈 때 왼팔이 나가야 자연스러운데 그 애는 왼발·왼팔, 오른발·오른팔 이렇게 같이 나가며 뻣뻣하게 움직이는 거였다.
 

  관광객을 상대로 돈벌이하던 낙타도 가장행렬 속에서 한몫하고 있다. 그제 우리와 공기놀이하던 남자 애는 낙타를 탄「사막의 전사」로 변장을 했다. 무사복장과 터번에 깃털을 꽂고, 콧수염을 팔(八)자로 해서 둥글게 말아 올리고 반달 칼을 쥐고 있었는데, 못 알아 볼 정도로 아주 그럴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모레 떠난다고 할 때 서운해하던 아이다.

  수레를 개조해서 만든 멋있는 무개차도 열댓 개 있다. 화려하게 치장이 된 덮개를 한 소들이 앞에서 끌고 갔는데 매일 어슬렁거리고 빈둥거리던 소들은 이때 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궁전의 시녀들이 되었다. 물론 신랑과 신부는 왕자와 왕비가 되어 멋있는 휘장으로 꾸며진 트럭으로 만든 무개차에 각각 타고 있다.  가장행렬은 허술한 면도 보였지만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결혼식 장면의 일부이니 만치 볼만한 가치도 있는 것이다.  

  아까운 목걸이　

  마지막으로 아씨식당에 들렀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언니가 휫슬이 달린  내 목걸이를 보자고 했다. 그리곤 음식이 나와서 식탁에 놓았는데 나갈 때 보니 목걸이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목걸이를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없다고 하며, 아까 주지 않았냐고 한다.
  이 목걸이가 너무 좋아서 소중히 아끼며 인도까지 목에 걸고 다닌 것인데, 오늘 없어진 것이다. 서운한 마음에 눈에 눈물이 번졌다. 나는 언니를 힘껏 때려줬다. 언니도「왜 때려 인간아 -,  아프단 말이야 !」하며 나를 쳤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빠의 눈치를 봐가며 싸웠다.  

  숙소에 와서 공연히 화장대며, 담요와 침대까지 다 들쳐봐도 없다. 아깝지도 않은 미투나 장난감들만 굴러 나왔다. 나는 너무 슬펐다. 어깨가 들먹여질 정도로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아빠가 화장실로 가자, 언니를 발로차고 주먹으로 때렸다. 언니도 나를 때리고 해서, 분풀이 삼아 마구 싸웠다.  
  이제 버스를 타고 잔시로 가는 길이다. 잔시에서는 침대기차를 타고, 자면서 델리로 간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각자 배낭을 매고 버스 정거장으로 가면서 잠시 식당에 들렀다. 혹시 목걸이를 보지 않았냐고 아빠는 종업원에게 물어보았지만 허사였다.  골든 까페의 딕 오빠 같았으면 찾아주었을지도 모른다.
  전에는 버스좌석엔 항상 언니와 같이 앉았는데 이제 서먹해져서 아빠와 함께 앉았다. 나는 지금 정들었던 목걸이 생각밖에 안 난다. 눈물로 차창 밖의 풍경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빠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도 잃어버릴 수 있는데, 그나마 다행일수도 있다 하며 집에 가서 사주마고 했다.    

  여주 수련원에서 천원 주고 산 것인데, 입으로 불면 새 울음 같은 고운 소리가 나는 휫슬이 달린 목걸이였다.  나는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려 팔로 가리고 흑흑 거리며 잔시에 도달할 때까지 다섯 시간 동안 울었다.